흑욕의 왕국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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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소설은 SM, 수간, 윤간, 난교, 레즈, 남색, 근친, 기타등등을 포함하고 있으니 다 읽고나서 돌 던지지 않으실 분만 보시길 바랍니다 ^^;





흑욕의 왕국(1)





도망쳐야했다. 살육자의 검이 붉게 빛나는 것을 최초로 보았을때 그렇게 했어야했다. 아니 그전에...... 정규군 훈련을 받은 병사들의 목이 삽시간에 떨어져 나갔을 때 눈치챘어야했다. 검은 궤적이 ?고 지나간 공간에는 어김없이 병사들의 뼈와 살과 피가 폭사하듯 흩날렸다. 그 핏방울들이 안개를 이루어 대지에 자욱하게 깔렸을때는 이미 도망치는 것조차 늦어버렸다.



루벤 백작을 모시는 여기사「쿠하르 자핀」은 백작의 명으로 왕도에 공물을 운반하는 중이었다. 운반에 동원된 인원만 200명에 달하는 대행렬이었다. 게다가 200명 모두가 무장을 하고 있는 정규군이었기에 그들이 지나가는 경로엔 산적은 커녕 민간인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왕국의 치안은 그야말로 엉망이었지만 정규군 부대를 상대로 싸움을 걸 만큼 간 큰 녀석들이 있을리는 없었다.



허나 별다른 위협없이 왕도 근처의 골짜기에서 다다랐을 때, 녹슨 갑옷을 입은 한 명의 사내가 이 대행렬의 앞을 막아섰다. 검붉은 녹이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브레스트를 걸친 사내였다.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뤘는지 몰라도, 그의 붉은 갑옷과 붉은 망토는 검흔으로 인해 그 효용성조차 의심스러울만큼 망가져 있었다.



터무니 없게도 그는 자신이 산적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0명의 수송부대를 향해 항복을 요구했다. 그리고 쿠하르는 허탈한 표정으로 사내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단신으로 정규군 부대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녀석은 미친 놈이 분명했으니까.



그것으로 이 말도 안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쿠하르는 식은 땀을 흘리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1 대 200의 전투. 그것이 시작될때는 삽시간에 제압될 것이라 판단했고, 첫번째 병사가 희생되었을때는 그 병사를 멍청한 자식이라 매도했으며, 열번째 병사가 쓰러졌을때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백번째 병사가 쓰러졌을때야 비로소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광검, 파울로.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지만 분명 파울로였다. 단신으로 행렬을 휘저으며 맹렬한 피보라를 일으키는 사내. 한때 친위대장까지 지냈고, 왕가의 개라고 비하되기까지 했던 맹장의 검이 이제 제 주인을 겨누려는 모양이다. 주인에게 배신당한 울분을 한순간에 분출시키기라도 하듯 그의 손속에는 사정이 없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창을 꼬나쥐고 그를 견제하지만, 창신은 허무하게 두동강나고, 병사들도 창과 함께 두동강난다. 머리통이 날고, 팔다리가 뒹군다. 쏟아지는 내장을 움켜쥔채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병사와 검흔으로 눈을 잃은채 절규하는 병사는 다른 병사들의 사기를 밑바닥까지 추락시킨다.



어째서 실각된 이후로 몇년동안 아무런 소식 조차 없던 파울로가 이 곳에 나타난 것일까? 왜 아무런 경고도 없이 왕국의 병사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인가. 왜 하필 내가 책임지고 있는 행렬이란 말인가. 답은 나오지는 않는다. 아니 답이 나올 시간조차 없다. 이미 눈앞의 병사들은 모두 쓰러져 바닥에 널부러져 있으니까.



더 이상의 방관은 책임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녀는 등 뒤의 병사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고 눈 앞의 살육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쿠하르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눈 앞에는 친위대의 갑옷을 입은 파울로가 서 있다. 녹슬고 색이 바래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눈치챌 수 없지만 분명 과거 친위대의 갑옷이다.



그는 방금 쓰러진 병사의 시신을 한쪽 발로 지긋이 밟은 채, 오만한 표정으로 쿠하르를 노려보고 있다. 하나뿐인 눈빛이지만 엄청난 박력이 느껴진다. 쿠하르는 살아돌아갈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뺨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소름이 돋는다. 수많은 전장에 참가했던 그녀가 이토록 겁에 질려보긴 처음이었다.



이길 수 없다. 절대 저자에게는 이길 수 없다.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 파울로는 점점 커지고 있다. 하늘을 가리고 세상을 온통 검은 그림자로 뒤덮는 거인이 되어 그녀를 압박하고 있다. 세포하나하나가 겁에 질린 괴성을 지르고 있다. 눈의 초점조차 제대로 맞지 않는다.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다.



『뭐, 뭐, 뭐하는 짓입니까. 파울... 파울로경.』



어떻게든 목소리를 짜내보지만 제대로 나올리 없다. 용기를 내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어 보지만 겁에 질린 기사는 조롱거리밖엔 되지 않는다. 등 뒤의 병사들은 자신의 여지휘관을 애타는 심정으로 지켜볼 뿐이다.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중이지. 이 빌어먹을 왕국과 돼지밥으로 줘도 시원찮을 왕에게 말이야. 기왕이면 화끈하고 강렬한게 좋잖아. 그나저나 날 알고 있군, 자네.』



선전포고. 선대 친위대장이 반역을 입에 담고있다. 너무나도 광오하다. 내가 알고 있는 파울로는 저런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왕국의 몇 안되는 긍지있는 기사중 하나였다. 쿠하르 역시 왕도에서 기사 수행을 하고 있을 당시 그와 몇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절도있는 행동과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거의 모든 수행 기사들이 그의 모습을 목표로 삼았을 정도로 그는 살아있는 기사도 그 자체였다.



쿠하르가 알고있는 파울로는 결코 함부러 사람을 죽일정도로 냉혈한이 아니었다.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잊어버린 그를 보자 왠지모르게 화가 난 쿠하르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기사로써의 명예는 잊어버리신 겁니까?』



『기사도 따위는 잊은지 오래야. 내 오른쪽 눈에 달궈진 검이 파고 들었을때 눈과 함께 녹아버렸지. 그런데 날 알고 있는 자넨 누군가?』



『루벤 백작령의 기사. 쿠하르 자핀입니다. 당신이 친위대장으로 있을 당시에 왕도의 아카데미에서 수행중이엇습니다. 루벤 백작께서는 파울로경과 아무런 은원도 없는걸로 알고있습니다만.』



『뭐, 상관없어. 왕국의 깃발을 앞에 내세운 모두가 나에겐 적이니까.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재수없는 깃발이 눈에 띄더군. 그래서 밟아줬을 뿐이야. 개미를 짓밟는데도 하나하나 이유를 달아야한다면 그거야말로 피곤한거지.』



『변했군요. 당신은 원래 이런분이 아니었습니다, 파울로경. 내가 아는 파울로경은......』



순간 파울로의 발 밑에 있던 빈사 상태의 병사가 꿈틀거렸고, 파울로는 그대로 병사의 목에 칼을 박아넣었다. 후두둑하고 그의 얼굴까지 선혈이 치솟아 올랐다. 파울로는 혓바닥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핥으며 나즈막히 읊조렸다.



『파울로는 죽었어. 충성을 바친 왕께서 직접 죽이셨지. 뒷구녕이라도 핥으라면 따를정도로 충성했는데, 그 댓가는 너무나도 멋지더군. 어머니는 병으로 죽고, 누이는 창녀로 팔려갔지. 여동생도 노예로 팔려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충성에 대한 댓가치고는 너무나도 적절하지않아?』



『......』



『파울로 그레이먼은 어느 캄캄한 뒷골목에서 개처럼 빌어먹다 뒈져버렸다. 그의 충성심도, 기사도도, 명예도, 엿같은 뒷골목에 내버려졌지. 그러고나니 증오밖엔 남는게 없더군. 나는 제스로, 그 녀석이 남긴 증오의 덩어리다. 그리고 증오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중이지.』



파울로, 아니 제스로는 병사의 목에 박힌 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는데도 검이 공명하는 소리가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검신은 선홍색으로 빛나고, 검에 묻은 피는 증발하여 안개처럼 흩어진다. 오러. 일반적인 백색의 오러와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분명 오러다.



『너희는 여기서 다 죽는다. 진즉에 항복했으면 좋았잖아.』



『후퇴해라. 모두 내가 책임진다.』



제스로에 맞서 옥쇄할 각오를 한 쿠하르가 뒤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상대는 폭발적인 오러를 뿜어대는 괴물. 더 이상의 희생은 불필요하다. 어차피 죽을거라면 하나의 목숨으로 막아내는게 이득이다.



그래도 내심 병사들이 몇명이라도 남아주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도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던 병사들은 후퇴명령이 떨어지자 뒤도 안돌아보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병사가 골짜기아래로 사라지고 나서야 쿠하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죽는 일만 남은건가?



쿠하일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검의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그녀가 제스로를 향해 다시 시선을 옮기는 순간 그녀의 귓가에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하들을 도망치게하려고 자신을 희생한다라...... 맘에 드는 녀석이군. 일단 살려두도록 하지. 하지만 검을 뽑으면 넌 죽는다.』



제스로는 이미 쿠하르의 시선을 벗어나있었다. 그는 어느새 쿠하르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 마치 원래부터 거기 서 있던 것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쿠하르의 심장은 바닥까지 덜컥 내려앉았고, 근육은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굳어버렸다. 검날은 반쯤 뽑힌 상태였지만 몸이 굳어버려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인간이 아냐. 쿠하르는 생각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올 수 있는 거리가 결코 아니었다. 검을 뽑으면 죽는다는 위협도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죽는다. 쿠하르는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저, 전 기사입니다. 주, 죽더라도 당신과 검을 겨루......』



『애송이, 네가 나와 검을 섞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건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곧바로 목이 달아날꺼다. 명예? 기사도? 헛소리 집어치워. 그냥 개죽음이다.』



쿠하르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마음 속으론 검을 뽑아야한다고 외쳤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공포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썩은 나무처럼 후들들 떨어댈뿐이다. 어느 신경하나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숨 쉬는 것조차 한없이 힘들다.



무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기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목숨보다 명예가 소중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 꼴은 뭔가? 죽는게 두려워 적을 눈앞에 두고도 머뭇거리다니...... 검을 뽑아야한다. 자핀 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는 용서되지 않는다. 검을 뽑아야한다.



쿠하르의 곁눈질에 살육자의 시선이 잡힌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사신의 눈빛. 심장을 짓누르는 영혼의 무게. 발검을 주장하는 심장의 공허한 외침은 머리로부터 거절된다. 뽑으면 죽는다. 털 끝하나 움직이지마! 신체는 머리에 구속되어 철저히 그 명령에 따른다. 뜨겁지 않은 심장. 그녀의 심장은 죽음을 초월할 정도로 뜨겁지 않다.



『뽑고 싶다면 뽑아라. 하지만 넌 검을 뽑기전에 죽는다.』



결국 그녀는 검을 뽑지 못했다. 검의 손잡이를 꽈악 쥔채로 완전히 굳어버렸다.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적을 눈앞에 두고도 겁에질려 검조차 뽑지 못하는 애송이였다니.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든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감과 나약함에 흘리는 눈물이다.



『제길......』



『너무 억울해할 것 없다. 널 버리고 도망친 사내 새끼들은 전부 이 곳에 뼈를 묻어야 될테니까. 그리고 넌 어쨋든 목숨은 부지했잖아? 물론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야.』



동시에 멀리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아마도 부하들이 있었을테지. 아무리 강한 검사라도 200명의 대군을 단신으로 막아설리는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이 자의 실력을 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군. 퇴로가 없는 공간에 갇혀있었다면 혼자서 우리를 다 베어버렸을테니.



사념은 사념으로 끝날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러는 순간에도 병사들이 비명이 잦아든다. 간혹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오지만 이내 외마디의 비명과 함게 사라져간다. 보이지는 않지만 알 수있다. 그들은 모두 죽어가고 있다. 단 한명도 남김없이. 눈 앞의 살육자의 말대로.



검을 쥔 손은 힘없이 늘어지고 고개는 힘없이 떨궈진다. 병사들을 다 잃고 혼자서 살아돌아가는 기사라...... 아니, 돌아갈 수 있기는 한건가? 쿠하르는 자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절...... 어떻게 할거죠?』



『글쎄, 한동안 여자에 굶주려 있었으니 요기라도 할까 생각중인데?』



이 상황에 농담인가? 쿠하르는 고개를 들어 제스로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는 피칠갑이 된 얼굴로 귀신처럼 웃고있다. 정말로 입이 찢어질 듯 빙그레 미소짓고 있다. 하얀색의 치아가 붉은색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반짝거린다. 너무나도 공포스럽고 아름다운 악마의 미소다.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할 순 없지만 좋은 꼴을 보게 될거라 생각치는 않는다. 쿠하르는 그저 이를 악다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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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는 겁니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쿠하르는 제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저항을 포기하고 난 뒤 제스로가 한 일은 그녀의 검과 갑옷을 빼앗아 수풀 속으로 던져버린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신발마저 빼앗아 숲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녀가 입은 거라곤 갑옷 아래 받쳐입는 坪?옷가지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활동성을 위해 몸에 착 달라붙는 차림이었기에 여간 부끄러운게 아니었다. 그녀는 항의했지만 제스로는 그녀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해버렸다.



의외로 운반하던 공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쿠하르가 이유를 묻자 제스로는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할테니 걱정말라는 식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제스로가 말한 부하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제스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쿠하르를 이끌고 산 속 깊은 곳으로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포로같지 않은 포로와 살육자의 동행은 그렇게해서 이루어졌다.



맨발로 산 속을 헤메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돌뿌리라도 발바닥에 밟히는 경우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때문에 발 밑이 엄청나게 신경쓰였다. 더더욱 기가 막힌건 제스로가 자신의 배낭을 그녀의 등에 지게하고 자신은 편하게 걷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등 뒤의 무게와 발의 통증으로 인해 피로가 급격히 쌓였다. 게다가 태양까지 머리 위로 떠올라 땅은 달아오르고 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땀에 절은 옷가지는 수축해서 더더욱 몸을 바싹 죄어들고, 아무것도 안입은 것과 다름없이 속살을 환히 비쳐보인다. 젖은 옷 아래로 선명하게 비치는 유두와 음부를 가리느라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않다. 간혹가다 제스로가 뒤를 돌아보기라도하면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가슴과 음부로 손을 가져간다. 그때마다 제스로의 입가에 맴도는 웃음.



쿠하르도 그가 자신을 일부러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부끄럽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즐기고 있다. 변태 자식.



목적지도 모른채로 험한 산중을 맨발로 걷기를 벌써 여섯 시간째.



『어디로 가냐니까요!』



쿠하르는 마침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라 소리쳤다. 새벽녁에 벌어졌던 참극은 머리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는지 제스로를 향해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일부러 괴롭히는 듯한 제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가득차있을뿐, 예의 공포는 사라진지 오래다.



제스로는 한번 슬쩍 뒤돌아보고는 계속해서 또 걷는다. 참다못한 쿠하르는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매정한 인솔자에게 소리친다.



『이봐요! 난 더 이상 못가겠어요!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해요!』



그제서야 제스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내뱉는다.



『계속 걸어.』



『말을 귓등으로 듣는거에요? 힘들어서 더 이상 못가겠다니까요! 아니면 이 배낭이라도 좀 들어줘요! 세상에 여자한테 짐을 들게하는 법이 어디있습니까!』



『기사인 주제에 자신이 계집이라는 걸 당연하게 이야기하는군. 항상 그런식으로 처신했는가? 힘들 일은 여자란 이유로 피하고, 필요할땐 여자란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너라는 녀석은 그렇게 기사자리를 얻은 계집애에 불과한가?』



『그... 그런건 아니지만......』



분하지만 옳은 말이었다. 여자라는 핑계로 힘든 일을 피하려는 건 옳지 못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애당초 자신이 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명백하다. 항의하는 방법이 틀렸을뿐.



『아뭏튼 못 걸어요! 더 이상은 못 걸어요! 발바닥도 상처투성이라고요!』



실제로 그녀의 발바닥은 자잘한 상처들과 물집으로 뒤덮혀 눈뜨고 보기 힘들정도였다. 꾸준한 훈련으로 기본 체력이 있었기 망정이지, 보통 여자 같았으면 진작에 쓰러지고도 남을 만한 상처다. 등 뒤의 배낭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산에 오르는 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쇳덩어리에 준하는 그 무언가가 들어있다. 건장한 사내조차 지고 가기 힘든 무게다.



제스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완전히 뒤돌아서 그녀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럼 버리고 가야겠군.』



스걱. 짧은 파공음과 함께 날카로운 검끝이 그녀의 목줄기에 와 닿는다. 그전의 동작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마치 마술처럼 어느샌가 검이 목 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밖에는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이 검에는 살기가 없다. 게다가 검끝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누군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거나, 반대로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즉 망설임이 없을때 검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눈빛을 보아 느끼건데 분명 후자다. 그는 결코 죽일 생각이 없다. 이것은 단지 떠보기 위한 용도의 발검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쿠하르는 알 수 없는 용기에 힘입어 호기롭게 소리쳤다.



『젠장! 찌를테면 찔러요! 이따위 대접을 받을 바에야 차라지 죽어버리는게 낫겠어요!』



『훗, 자기 주제도 모르고 기세만 당당하군. 뭐, 이번엔 그대의 뜻대로 잠시 쉬어가도록 할까.』



제스로는 예상대로 검을 회수한다. 아무리 예상을 했다지만 쿠하르의 입에서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검이 목에 와닿는 느낌은 결코 좋은 느낌이 아니다.



제스로는 커다란 떡갈나무를 등지고 앉아 쿠하르에게 이리와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그녀는 내키지 않지만 별 수 없이 제스로의 곁에 다가가 자리를 잡는다.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하는거죠?』



어디로 가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다. 이 고통스러운 발로 얼마나 더 걸어야하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제스로는 묵묵부답. 그저 허리춤의 가죽수통을 끌러 물을 들이킬 뿐 그녀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꿀꺽꿀꺽. 적막한 숲속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소리와 제스로가 물을 들이키는 소리뿐. 그제서야 쿠하르도 미칠듯이 목이 마름을 느끼고 물이 넘어가는 제스로의 목울대를 바라본다. 입가를 타고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간절하다못해 애절하기까지하다. 하지만 물을 들이킨 제스로는 수통을 다시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말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네 몫은 없으니 기대하지마라.』



얄밉다. 미치도록 얄밉다. 이렇게 얄미운 자식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생각같아선 한대 때려주고 싶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 그러지도 못한다.



제스로는 이번엔 쿠하르에게 배낭을 달라고 손짓한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인지 배낭은 들어주려는 모양이다. 배낭을 건네받은 제스로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늘어놓기 시작한다.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하냐고 물었지?』



제스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무언가를 땅위에 던져놓는다. 그것은 1미터가 조금 넘는 쇠사슬로 연결된 족쇄의 꾸러미. 제스로는 의아해하는 쿠하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인다. 다분히 장난기어린 미소다. 쿠하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스로를 바라본다.



『이게 뭐죠?』



『아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돼. 이제부턴 기어가야 할테니까.』



『뭐, 뭐하는 짓이에요?』



제스로는 쿠하르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는 족쇄를 채웠다. 묵철로 만들어진 이음새가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리자 더할 나위없이 견고하게 손목을 구속한다. 제스로는 손목의 족쇄와 사슬로 연결된 반대쪽 족쇄를 집어들어 엉뚱하게도 그녀의 발목에 채운다.



『이... 이봐요!』



그리고 하나 더. 반대쪽 손목과 발목에 똑같은 방식으로 채워진다. 저항을 해보지만 제스로의 악력은 터무니없이 강해서 쿠하르의 어설픈 저항은 그저 어린아이처럼 무력할 뿐이다.



족쇄의 길이는 1미터 남짓. 짧은 길이의 쇠사슬로 발목과 손목이 연결되어 있기에 허리를 펼 수가 없다. 족쇄를 찬 쿠하르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제스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포로라지만 이런 식으로 대하는 법이 어디있습니까?』



『포로라...... 그건 이념과 사상이 다른 두 국가가 전투를 수행하고 난 이후에 생기는 부산물이 아니던가? 그대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 같군. 애초에 난 나와 내 부하들의 이익을 위해...... 뭐, 오늘 같은 경우엔 내 화풀이 대상에 불과했지만. 의도야 어찌되었든 난 오늘 산적으로써 그대의 군대를 맞이했다. 내 이상을 관철시키겠다는 거창한 목표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그저그런 산적질을 한 것 뿐이라고. 다시 말해, 넌 포로가 아니라 노예로써 끌려온거다. 일종의 전리품 같은거지.』



『그... 그런!』



『아마 그대가 남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꺼다. 남자 노예는 그다지 값어치가 없거든. 산적의 입장에선 몸값을 요구하는 것도 번거롭고말이야. 하지만 너처럼 젊고 반반하고 긍지있는 여기사라면 그 희소성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지. 이웃 나라에 팔아버리면 꽤나 비쌀 것 같아서 주워왔을 뿐이다.』



쿠하르는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제스로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머금은 그의 미소는 너무나도 차갑다. 하지만 어색하다. 자연스럽지만 어색하다. 너무나 상반된 표현이 잘 어울리는 미소다. 만들어진 미소. 정말로 만들어진 미소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내고 있다.



애초에 사고방식이 이상한 녀석이었다. 자신이 습격한 수송부대의 지휘관을 끌고가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루벤 백작령에서도 애물단지에 불과한 여기사를 데려다가 어디에 쓰려고? 난 기껏해야 수송임무나 병사훈련따위의 잡무만을 맡기는 하급기사인데.



몸값 흥정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다. 루벤 백작은 돈을 위해서는 휘하의 부하들은 얼마든지 희생시킬 사람이니까. 한때 왕국의 녹을 먹던 제스로였기 때문에 루벤의 성격을 분명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지독한 수전노인 것은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다 알고있다.



그렇다고 노예로 팔거라곤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비록 왕국에서 버림받은 몸이지만 제스로...... 광검이라 불리었던 「파울로 그레이먼」은 한때 친위대장까지 오른 기사중의 기사였다. 수 많은 기사들의 그의 등을 보며 꿈을 키워왔고, 그가 행해온 왕가에 대한 충의를 본받았었다. 아무리 실각되었다지만 광검 파울로가 기사의 길을 걷고있는 후배 기사를 노예로 팔아버리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파울로 그레이먼은 어느 캄캄한 뒷골목에서 개처럼 빌어먹다 뒈져버렸다. 그의 충성심도, 기사도도, 명예도, 엿같은 뒷골목에 내버려졌지. 그러고나니 증오밖엔 남는게 없더군. 나는 제스로, 그 녀석이 남긴 증오의 덩어리다. 그리고 증오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중이지.



제스로가 꺼냈던 이야기는 자신의 각오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오늘의 이 행위는 파울로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기위해 일부러 자처한 것일지도 모른다. 망설임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더 잔인하게, 더 매정하게 사람을 베었다. 잠적해있던 오랜 기간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일 것이다. 악해지기 위해, 자신의 근본을 뿌리채로 바꾸기위해, 마음에 칼을 담고 돌아왔다는 메세지를 그의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첫 희생물로 선택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어색하고도 자연스러운 미소. 제스로가 아닌, 아직은 파울로인 남자가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는 쿠하르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꾼다. 저 차가운 미소의 뒤에는 무표정한 파울로가 있다. 제스로가 되기위해 악마의 길을 선택한 파울로가 있다.



하지만 억울하다. 그 희생물이 왜 하필 나여야 하는데! 왜 그 유희의 제물이 내가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젠장!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터져나오는 쿠하르의 괴성에 제스로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신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또 다른 족쇄가 들려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죽으로 된 형태의 구속구였고, 발목이나 손목에 채우기엔 약간 컸다. 구속구의 중앙에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고 쇠사슬의 끝에는 역시 가죽으로 된 손잡이가 매달려있다. 그것은 분명 수갑이나 족쇄와는 성격이 먼 개목걸이의 일종이였다.



『그래 그대의 말대로 파울로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지. 하지만 난 파울로가 아니야.』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거야!』



『글쎄...... 이제 슬슬 버르장머리없는 노예에게 예절을 가르키기 위해서랄까?』



제스로가 쿠하르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운다. 손을 휘저어 저항해보지만 발목에 연결되어 있어서 제대로 저항 할 수조차 없다. 손을 들어올리면 다리가 따라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이면 손이 따라 내려간다. 일어서는 것도,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창피한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싫어! 이런 모습은. 이제 투덜대지 않을테니까 풀어줘요!』



『출발하지.』



제스로가 목줄을 잡아당기면서 일어나자 쿠하르 역시 휘청거리며 일어나다가 땅으로 쓰러진다. 쇠사슬이 짧아서 발과 손이 모두 땅에 닿지 않으면 이동할 수조차 없다. 이건 영락없이 개의 모습 그대로다. 수 많은 남자기사들의 모욕과 편견 속에서도 꿋꿋히 자존심으로 버텨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토록 굴욕적이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아본적은 없었다.



『못 가요!』



억지로 힘을 주어 버텨보지만 제스로에 의해서 당겨지는 가죽목걸이가 숨통을 조여온다. 그래도 억지로 버틴다. 호흡이 힘겨워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지만 그래도 버틴다. 이런 수치를 받게된다면 그녀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게된다. 이건 결코 용납할 수 있는 범위의 모욕이 아니다. 이런 굴육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면 기사의 긍지는 그것으로 끝이다. 아니 기사의 긍지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마저 끝이다.



『산적따위에게 목숨을 맡긴 순간 그댄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다. 이제와서 챙길 자존심이라도 있는건가?』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시끄럽군. 하지만 주인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노예도 나름대로 매력은 있어. 특히 그대와 같은 기사라면 더더욱 가치가 있지. 물론 성노(性奴)라는 전제하에서.』



성노(性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쿠하르는 몸이 얼어버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최악의 결과를 정말로 입에 담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쿠하르의 몸이 얼어붙은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스로의 손이 검집에 닿는 것을 본 순간 주변의 공기가 크게 진동했기 때문이다.



공명. 검이 공명하고 있다. 날카로운 공명음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있다. 파울로의 검은 광검이다. 실제로 빛보다 빠를리는 없겠지만 여하튼 발검이 빠르다는데서 붙여진 아명이다. 소드 마스터라는 추측은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실제로 그의 검을 맞대어 본자는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물론 병사들을 사정없이 베던 제스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소드 마스터 그 자체였고, 쿠하르는 그의 검을 눈으로 본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검은 실제로 빛처럼 빨랐고,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쿠하르는 제스로의 실력이 지금껏 귀로 들어온 그 어떤 소문의 검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다시금 몸소 체험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고 벤다. 그녀는 소드 마스터의 극의를 최초로 목격하고 있었다.



단순히 발검의 준비동작만으로도 대기가 흔들린다. 쿠하르의 몸 또한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무섭다가나 추워서 흔들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대기와 공명하여 자의와는 상관없이 흔들리는 것이다. 바람이 몸을 더듬고 탄력있는 피부는 완전한 액체처럼 찰랑거린다. 수면위에 파동이 지나는 듯이 거짓말처럼 일렁거린다. 바람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쿠하르의 몸 구석구석에 머물면서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정령이 강림한 느낌이다. 짧은 흑발의 머리카락은 마치 물 속에라도 들어온 양 부드럽게 흩날린다.



찰라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지고, 몸은 한 없이 가벼워 날아 붕 떠오를 것만 같다. 그녀의 坪?옷 속으로도 바람들이 새어들어와 머문다. 소매 사이로 계속해서 바람이 밀려들어와 그녀의 坪?옷을 부풀린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하는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한없이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신비한 기분은 제스로의 기합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타핫!』



제스로의 검이 절반쯤 나왔다가 멈춘다. 동시에 비명을 지르던 바람은 굉음과 함께 찢어져 비산한다. 쿠하르의 옷도 갈기갈기 찢어져 비산한다. 마치 거짓말처럼 조각조각 찢어져 흩어진다.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져가는 옷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쿠하르는 아주 잠시동안 그 흩날리는 모습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꺄악!』



그녀는 자신의 옷이 모두 벗겨졌음을 알고 비명을 질렀다. 작지만 탄력있는 유방이 크게 흔들거렸고, 사타구니 사이로는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온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쿠하르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서둘러 가슴과 음부를 가렸다.



제스로는 검을 마저 검집에 집어넣으며 싱긋이 웃었다.



『그다지 흠 잡을 곳은 없는 몸이로군. 가슴이 좀 작은게 흠이랄까?』



『뭐, 뭐, 뭐하는 짓이에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심하게 더듬거린다. 하지만 제스로는 아랑곳 하지않고 쿠하르의 나신을 묵묵히 감상했다.



군더더기없는 몸매는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균형이 잘 잡혀있다. 옆구리와 어깨엔 눈에 띄는 검상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매력있다. 나름대로 꽤 많은 전장을 겪어왔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적을 만난 건 처음일테지.



『처녀인가?』



『무, 무슨 소리에요!』



『처녀냐고 물었다.』



쿠하르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가운데서도 실례되는 질문을 한 제스로를 노려보았다. 이젠 완전히 놀림감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불쾌하고 창피하다. 분하지만 어떻게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제스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녀의 목줄을 다시 잡아챘다. 다분히 악의적인 행동이었다. 쿠하르가 켁켁거리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는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직접 알아보는 수도 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은 더더욱 달아올라 새빨간 토마토처럼 변해버렸다. 직접 알아본다는 말에 쿠하르는 영원히 잊고 싶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너무나도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떠올라 눈 앞에 아른거린다. 힘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했던 수습기사 시절의 트라우마가 두려움으로 바뀌어 심장으로 전해져온다.



제스로를 노려보던 눈동자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궈지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코 끝이 시끈거린다.



겁탈당한다. 이 자에게 겁탈당한다. 무섭다기 보다 서럽다. 수 년간 단련한 건 뭐였단 말인가! 어째서 이런 수모를 다시 겪을 정도로 약하단 말인가! 어째서 저항조차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단 말인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란 여자는 너무도 약하다! 서러움이 복 받쳐 올라 목이 잠긴다.



『질문에 대답해라.』



『...... 아... 아...니...』



말을 끝까지 뱉지도 못했다. 너무나도 서럽다. 처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첫 경험을 원해서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비밀스러운 일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강인한 마음을 가진 그녀였지만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은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리고 이어진 제스로의 한마디는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더러운 계집이었군.』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아! 그건 내 의지가 아니였는걸! 변명의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서러움의 무게에 눌려 다시 잠겨버린다. 그의 말을 부정해서 득이 되는 건 없다. 내 자신이 더 창피하고 초라해질 뿐.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린다. 봇물처럼 터진 울음을 막을 정신력도 없다.



『처녀였으면 한번 안아볼까도 생각했는데, 기분이 싹 가셨어. 그만 훌쩍거리고 출발하지.』



정신이 확 돌아온다. 절대 이런 모습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목이 잠겨서 말을 할 수 없지만,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제스로의 인도를 거부한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저항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하다.



하지만 제스로는 매몰찬 인간인 모양이었다.



『자존심따윈 버려라. 그대의 의지가 어떻든간에 난 그대를 노예로써 획득한 것이다. 내 소유물이란 말이다. 난 수 년 간 여자에 굶주려왔고, 금방이라도 그댈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그리고......』



제스로는 입꼬리가 슬쩍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금방이라도 그대를 쓰러뜨리고 마음껏 범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하길 바란다. 지금은 단지 더 큰 기쁨을 위해 미루고 있을뿐이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겁탈하겠다라는 경고였다. 미처 답할 사이도 없이 목줄이 당겨지고, 쿠하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비참하게 끌려간다. 균형을 잡으려고 허리를 세워보지만 제스로의 걷는 속도를 따라가려면 개처럼 네 발로 기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오리걸음으로 걸어보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 허벅지 근육의 통증이 극심하다. 어쩔 수 없이 손이 다시 땅에 닿는다.



『제발...... 흐흑...』



원하든 원치않든 쿠하르는 비참하게 네 발로 기고 있었다. 다행히 산중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리는 없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로 개처럼 끌려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비부를 가릴 틈도 없었다. 아담한 유방은 중력과 관성에 의해 리드미컬하게 출렁거리고, 걸음을 옮길때마다 사타구니가 벌어져 차가운 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모습이다.



『곧 익숙해질거다. 아니, 익숙해지지 않으면 더 괴로워질테니 익숙해지는 것이 좋겠지. 그러고보니...... 익숙해지지 않는 편이 더 좋으려나?』



제스로는 영문모를 소릴지껄이고는 행군의 속도를 더 높였다. 부끄러운 것도 문제였지만 네 발로 기어가는 쿠하르에게 있어서 체력의 소진도 큰 문제였다. 배낭은 제스로가 지고 있었지만, 그는 배낭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듯 엄청난 속도로 걷고 있었다. 익숙하지않은 자세로 산중을 이동하는 쿠하르가 금방 지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처... 하아...... 천천히...... 하아하아... 조금만... 하아......』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데도 불구하고 쿠하르는 완전히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무릅이 까지고, 발목이 부어오르고, 손톱이 빠졌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 갈 것처럼 헉헉거리면서 짐짝처럼 끌려간다. 입술은 말라비틀어지고 단내나는 입안에는 침조차 고이지 않는다.



제스로가 가끔씩 돌아보긴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괴로움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행위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녀의 목줄을 잡아당기는데 재미를 붙힌 듯, 심심하면 줄을 잡아당겨 지친 그녀를 자빠뜨린다. 그럴때마다 쿠하르는 흐느끼면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제스로를 바라볼 뿐이다.



이미 자존심 따위를 챙길 여력이 없다. 목소리를 쥐어 짤 힘이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 걸어갈 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스로의 바지를 붙잡고 조금만 쉬어가자고 애걸하고 싶은 심정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해는 점점 산너머로 사라져가고 마침내 제스로는 걸음을 멈추었다. 쿠하르는 기어가던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리고는 죽어가는 산짐승처럼 미약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 쉬... 하아... 는 건가요......』



『그래, 해가 졌으니 눈 좀 붙이다 가야겠지.』



제스로는 배낭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는 죽은 나무 등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보란듯이 허리춤의 수통을 끌러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쿠하르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반나절동안 엄청나게 많은 땀을 흘렸다. 하지만 제스로는 그녀에게 물 한 모금 주지않으면서, 자신은 틈만나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댔다. 중간에 개천을 만났었지만 제스로는 일부러 걷는 속도를 빨리하여 쿠하르가 그 곳에 잠시도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는 탈수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쿠하르는 힘겹게 손을 뻗으며 제스로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너무나도 힘겨워보였다.



『무... 물 좀......』



『아까도 말했듯이 네 몫은 없어.』



『제... 제발... 흐윽... 한 모금만......』



언제 이렇게까지 비굴해져 본 적이 있었던가. 쿠하르는 고작 물 한 모금을 구걸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 앞의 매정한 악마에게 측은해보이기 위해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한 모금의 물을 위해 영혼마저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스로는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깨버렸다. 수통의 물을 실컷 마시고 나서는 나머지 물은 자신의 머리위로 들이부었다. 쿠하르는 허탈한 표정으로 제스로를 바라보다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울분을 토해냈다.



『너무하잖아..... 나쁜 자식...... 매정한 자식......』



『마음대로 지껄이도록 해. 쓸데없이 소리질러봤자 그대의 목만 아프니까. 뭐, 정 목이 마르면 내 오줌이라도 받아마시겠나?』



『닥쳐...... 비열한 자식아... 흐흑......』



눈물조차 말라붙어 더는 흐르지도 않았다. 쿠하르는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몇 마디 더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토록 지독하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산행은 처음이었다.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릴 정도로 지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제스로는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덮으며 나무등걸을 베게삼아 누웠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 쿠하르를 일으켜 세웠다. 아무리 단련된 기사라지만 이런 산중에서 벌거벗고 노숙을 하면 얼어죽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스로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놓은 채 줄에 매달린 목각인형처럼 추욱 늘어졌다.



『쳇, 이번 한번 뿐이다.』



제스로는 쿠하르를 꼬옥 끌어안은 채 나무등걸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모포를 끌어와 쿠하르의 목 위로 덮어주었다. 제스로의 품에 안긴 쿠하르는 작은 고양이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동안이나 쿠하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제스로의 외눈도 조금씩 감겨들었다.





-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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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상인 라미엔트를 쓰고 난뒤에 나름대로 간소하게 먹고 사는데 지장없는 직장에 취직해서 바빳습니다. 원래 후속작은 라미엔트 2부를 쓸까하다가, 죽은 놈을 억지로 살려놓는 것도 못할 짓이라 생각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사이드 스토리는 니미.... 없습니다.



제 취향은 뽕빨물입니다. 야설은 야설답게 탁탁탁이나 잘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야설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의도하지 않게 힘이 들어가버렸습니다. -_-;;;

문체고 내용이고 다 때려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전희라는 것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붕가붕가한 내용이외에도 잡스런 내용들이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이왕이면 예쁘고 참하고 뭔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느껴지는 캐릭터를 부수는 쪽이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_-;;



일단 시작은 했습니다만 하는 일 없이 놀고먹던 예전처럼 광속으로 글이 올라오지는 않을 듯합니다. 어쨌든 고고싱입니다. 귀축물 원츄! -_-b



어쨌든 리플은 대환영이고, 악플도 환영이고, 무플은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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