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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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갔다 온 남자들도 뻗어서 자는데, 혼자서 국수 20인분을 만들고 있더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나도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자세로.

 

 

커다란 냄비, 펄펄 끓는 물에, 한 아름 국수를 넣고,

찬물을 바가지로 조금씩 부어가며 면을 삶아내고,

대형 소쿠리에 건져내 찬물로 헹구고,

고추장, 다진 마늘, 참기름, 설탕, 참깨 등을 섞어 비빔양념을 만들고.

 

 

난 멍하니 그 애를 쳐다보다가,

양념장의 찰진 냄새에 침만 꼴깍 삼켰던 기억이 난다.

 

연아가 능숙하게 요리를 하던 중,

날 획하고 돌아보며 말했어.

 

 

“여기 삶은 계란 좀 까서 반으로 잘라줄래?”

 

 

“어,. 그래;;”

 

 

둘이서 주방에 서서 나란히 요리를 하고 있으려니 기분 묘하더라.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고.

헌데 진짜 내 마음속의 드라마는 다음 순간 일어났어.

 

연아가, 차게 식혀 쫄깃해진 국수면발을 한 줌 뭉쳐,

빨간 양념을 묻히더니 내 입 앞에 대며 말했어.

 

 

“먹어봐, 맛있는지”

 

 

먹어보라고 말하는 그 애의 입술, 목소리, 표정.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깍쟁이 같았어.

근데 그 순간 그 애가 정말 사랑스럽더라.

 

하루 종일 땡볕 아래 걸어선지 발그레한 뺨, 그럼에도 흑백이 뚜렷한 맑은 눈,

이마위로 귀엽게 흐르는 잔머리.

 

난 연아가 내민 비빔국수를 냉큼 받아 물었어. 피곤하고 굶주려서였는 지 몰라도,

 

 

‘정말’ 맛있더라.

 

사실적으로 맛있었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받아먹는데 실수로 연아의 손가락도 살짝 물었어.

그 애도 놀랐는지 손가락을 꿈틀하는 게 내 입안에서 느껴지는데, 이상하게도 ‘확’ 하고 발기가 되더라.

 

 

“내 손가락은 왜먹어”

 

날 보며, 약간 의아한 듯이 연아가 말했어.

 

분명 농담이긴 한데 쉽게 웃을 수 없는 농담.

 

비빔국수를 우물거리다가,

‘맛있다’ 라고 말해주려고 그 애 얼굴을 바라본 순간,

 

 

깜짝 놀랐어.

 

연아가 코피를 흘리더라.

자기도 뭔가 느꼈는지, 손등으로 코피를 스윽 훔치고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더라.

그리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길래,

 

내가 ‘그러지마!’ 소리치며 번개의 속도로 휴지를 찾아와 그 애 코에 댔어.

연아 코를 손가락으로 눌러 지혈을 시키다 보니,

 

 

문득 우리가 너무 가깝게 있다는 걸 깨달았지.

나와 달리 그 애는 아무생각 없는 것 같더라.

 

하루 종일 개고생 했는데도 여전히 그 애는 향기로웠어.

내가 자기 얼굴을 만지고 있는데도 어떤 경계도 하지 않았지.

난 서로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연아를 아이처럼 어루만졌고,

그 애는 나의 케어를 받아 들였어.

 

그 때 내가 그 애한테 느꼈던 게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그냥 본능적인 끌림이었던 것 같아.

 

 

스무 명 가까이 되는 형 누나들은 짜증만 내거나 처자고 있는데,

가장 막내가, 평소 가장 말이 없던 애가, 그것도 여자애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 팀원들 밥을 짓고,

피곤해서 코피까지 흘리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 어떤 과장도 없이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다소 냉담한 태도.

 

그게 그 순간 너무나도 섹시하게 느껴지는 거야. 여전사 같았어.

한 무리에서 가장 우월한 개체를 대할 때 느껴지는 경외심,

그 경외심에 수컷이 암컷에게 필연적으로 갖는 ‘발정’이 합해져서,

그 순간 연아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느껴졌지;

 

 

그 때의 그 ‘심장 조임’이란.

 

 

지혈이 다 되자, 연아가 수도꼭지를 틀더니 차가운 물로 후루룩 세수를 하더라.

아무 거리낌 없이.

 

 

‘멋있다’ 고 느꼈어.

 

 

세수를 마치고 물 묻은 얼굴을 손으로 훔쳐 털어내더니 날 보며 차갑게 말했어.

 

 

“뭐해 사람들 불러”

 

 

 

 

그날 이후 난 그 애가 정말 좋아졌어. 같은 조가 된 걸 신에게 감사할 정도로

같이 있는 순간순간이 좋았어.

 

날 보는 그 애의 무심한 표정, 볼록 올라붙은 엉덩이, 하얗고 긴 목덜미,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손.

 

한 번은 다 같이 시장에 갔더랬어. 재래시장 같은 데였는데,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더라.

홀린 듯 이국적인 물건들을 구경하는 연아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애 손을 냉큼 잡았어.

 

날 힐끗 보더니 그냥 가만히 있더라. 그렇게 한 1,2분 손을 잡고 걸었나?

갑자기 연아가 내 손을 꽉 잡아 올리며 말했어.

 

 

“뭐야 너”

 

 

하아..그 시크한 태도와 말투. 난 너무 좋아서 껄껄 웃으면서 손을 놔줬어.

 

연아가 그런 날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더라.

 

난 계속 웃으면서 그냥 앞으로 갔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제는 형들이었어.

그 전에도 그랬지만, 비빔국수 사건이후로 연아 옆에 서성이는 형들이 부쩍 늘었어.

그 중에서도 같은 조 형은 조금 노골적이었지.

 

아랍인처럼 생겨가지고 만날 연아한테 “연아는 꿈이 뭐니” “연아는 가슴시린 사랑 해봤니” “정신과 육체적 사랑이 다르다고 생각해?”

같은 느끼한 멘트만 날려댔지.

은근한 스킨십은 물론이고.

 

 

연아는 늘 무표정하게

 

 

“말하기 싫은데요” “안 해봤는데요” “그런 거 꼭 생각해야 돼요?” 라고 받아쳐서

 

 

그 형을 무안하게 만들었지.

 

 

어찌나 통쾌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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