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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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도착해 현지 대학교 기숙사에 짐을 풀었어.

밤이 늦어서 그날은 그냥 잤어. 거긴 여름인데도 쌀쌀하더라.

 

 

두근거리는 첫날 밤.

 

 

같이 방을 쓰는 형의 러시아 매춘산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어.

 

 

다음날 좀 일찍 일어났어. 흥분감 때문에 잠을 잘 못자겠더라고.

혼자 몰래 밖으로 나왔어. 날씨 좋더라. 근데 좀 추웠어. 으슬으슬.

기지개를 한껏 펴고 담배에 불을 붙였지.

 

 

낯선 풍경들. 상쾌하고 투명한 공기. 높은 하늘. “즈드라스뜨 브이쩨! 러시안 걸즈~!”

기분이 좋아 의미 없는 말을 중얼대며, 담배연기를 후우~하고 뱉어 내는데,

 

 

누군가 옆에 보이는 거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보니까, 연아 더라.

 

 

“아이 깜짝이야”

 

 

걔도 잠을 설쳤는지 좀 피곤한 얼굴이더라. 추웠는지 커다란 잠바를 입고 있는데 좀 귀여웠음.

남자로 하여금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분위기. 세련된 선.

 

 

“잘 잤어? ....요?”

 

 

연아가 날 힐끗 보더니 짧게

 

 

“네” 하더라.

 

 

그러고 둘 다 침묵. 아오 정말 짜증나더라.

 

 

나 혼자 좀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서 담배 뻑뻑 다 피우고 연아 옆을 냉랭히 스쳐서 들어와 버렸어.

뒤에서 닫히는 기숙사 현관 문소리가 꽤 커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모여앉아 조를 편성했어.

인솔자 선생님이 그냥 임의로 편성해줬는데, 3인 1조 였지.

놀랍게도, 아주 놀랍게도 나랑 연아가 한 조가 됐어. 27살 짜리 형과 함께.

 

 

난 인솔자 선생님한테 가서 조를 바꿔달라고 말했어. 왜냐고 묻길래 어버버하니 그냥 하래.

“네”하고 방으로 돌아가 분노의 쉐도우 복싱을 했지.

 

 

달콤 쌉싸름한 나날들이었어.

금발에 늘씬한 슬라브 여학생들. 이국적 풍경들. 단체생활에서 느껴지는 일체감.

봉사활동이라는 뚜렷한 목적 뒤에서, 오히려 불타오르는 청춘남녀들의 뜨거움.

알게 모르게 많은 형 누나들이 서로 썸타는 것 같더라.

 

 

반면 피곤하고 짜증날 때도 많았어. 아무리 외국이라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인솔자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미션을 수행하고, 혼나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칭찬도 받고...

 

 

한 2주일 지나니까 갈등도 많이 생기더라고.

사람이 모이면 늘 그렇듯, 누가 누구를 싫어하고 좋아하고, 그게 소문이 되고,

그 소문을 옮기는 사람, 맞장구 쳐주는 사람,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사람 등등.

해병대 출신 인솔자 선생님의 빡센 리더십 때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즐거움과 괴로움이 얽히고설켜 팀 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지.

 

 

연아는 어땠냐고? Girl of steel 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늘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미션이 주어지면 가타부타 말이 없이 깔끔하게 해냈지.

흔들림이 없는 여자애였어.

 

 

그래도 나랑 별 말은 안 했어. 여전히 재수는 없었고.

 

 

반면 같은 조인 27살 형은 개 쓰레기였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력서 한 줄 넣으려고 온 사람이었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했어.

힘쓰는 건 내가 다 하고, 세밀한 작업은 연아가 다 하고,

그 형이 한일은 연아한테 추근대는 일 밖에 없었지.

 

 

맞아. 내 의견과는 별개로 연아는 오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외모도 외모지만 남자 쪽으로는 좀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같은 조형이 연아한테 은근슬쩍 스킨십을 많이 하더라고.

애들에게 줄 풍선인형 만들 때 옆에 달라붙어서 그 애 손이랑 어깨를 자꾸 만지고 그러더라.

 

난 연아 성격에 귀싸대기라도 한 대 날릴 줄 알고 흥미롭게 관찰 했는데,

그 형이 아무리 만져도 아무 생각 없이 풍선만 돌리더라.

다른 형들이 연아한테 야한 농담하고, 막 들이대듯이 말 걸고 그래도

무슨 말 하는 지도 모르는 것 같고.

 

선머슴아 같이 뚱해갖곤 말이지.

 

어쨌든, 연아 덕에 우리 조 성과가 제일 좋았어.

여전히 서로 말은 없었지만, 연아에 대한 나의 안 좋은 선입관도 많이 사라졌지.

확실히 사람은 같이 생활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걸 깨달았지.

 

 

일중독인 연아와 무한체력인 내가 버티고 있는 우리 조와는 별개로,

 

다른 조들은 엉망진창이었어. 심하게 피로가 누적됐었거든. 인솔자 선생님이 꽤나 강압적이었어. 아니, 어쩔 때 보면 싸이코 같았어.

“너희들 여기 놀러왔냐? 연애질 하러왔냐? 공짜로 해외 나오니까 재밌지?!!!” “너희들 한 명 한 명 내가다 점수 매기고 있다는 거 기억해라” 라며

윽박지르는 것은 기본.

 

학생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용서가 없었지.

어떤 형은 여권 잃어버렸다가 이역만리 타국의 길거리에서 주먹 쥐고 엎드려 뻗쳐했어. 고등학생도 아닌데;; 찾았기 망정이지,

못 찾았으면 아마 처 맞았을 수 도;;

 

학생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대는 이유였지.

 

 

어느 더운 날 거의 세 시간을 걸어서 일정을 소화했어.

숙소에 도착하니, 모두가 지쳐 쓰러졌지. 이미 어떤 여자애들은 울며 못하겠다고 그러고,

형들 사이에 큰소리도 오가고. 인솔자 선생은 누구 만나러 가버리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도 생각을 안 하더라.

보통 인솔자 지휘 하에 스폰 받은 쌀과 반찬 등으로 요리를 해먹거나,

아니면 밖에서 현지식 사먹거나 하거든?

근데 인솔자가 없으니까 모두가 배는 고픈데 귀찮아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거였지.

대부분 그냥 자더라고.

 

 

나도 맥없이 누워 있다가, 문득 공동으로 쓰는 주방을 갔어.

 

 

놀랍게도,

 

 

아주 놀랍게도 연아가 있더라. 예의 그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로 날 힐끗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하던 일을 하더라.

 

 

“뭐해?”

 

 

“비빔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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